룩 백
사무실 인테리어를 고민하면서, 나는 여러 만화가들의 작업실을 찾아보았다.
그들의 책상 배치는 어떠한지, 벽을 보고 있는지, 밝기는 어두운지 밝은지, 바닥과 벽면의 재료는 무엇인지 등.
이런 면을 보았을때, 만화가들의 작업 방식과 그들이 손끝으로 만들어 낸 결과물을 나는 동경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떠올린다.
나는 최근 몇 건의 인허가 상담과, 계약으로 이어질것 처럼 보이는 건들을 겪으며 여러 날들을 보내고 있다.
어느 저녁, 퇴근 이후 유튜브에서 애니메이션 룩 백(ルックバック)의 줄거리를 요약해주는 영상을 보게 되었다.
어린 두 초등학생이 만나 서로를 동경하며 만화를 그리고 성인이 되어 프로가 되어가는 모습에 관한 내용이었다.
애니메이션에 이어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으로 실사화된 영화도 개봉하였는데, 강렬한 인상에 영화까지 봐버렸다.

만화 "체인소 맨"을 재밌게 본 나로서는 이게 정말 같은 작가에게서 나온 감성인가? 싶은 순간이 많다. 하지만 조금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 이야기는 특정 작가의 작품세계와는 별개로, 만화가라면 지니고 있을 몰입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건축학과를 졸업한 학생이라면 많이들 공감하는 학생 시절 설계스튜디오에서의 경험이 비슷한 주제가 아닐까 싶다.
만화가, 웹툰 작가들의 삶을 보면 "주간 연재"라는 이름으로 매 주 일정 분량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리고 주간 마감을 위해 그들의 일상 대부분은 작업실과 책상이라는 공간에서 보내게 된다. 애니메이션화, 영화화 된 유명 만화들, 몇백만부 판매되었다고 광고되는 만화들이 탄생한 곳을 보고 있으면 근사한 공간이라기 보다는 오랜시간 몰입하며 작업할 수 있는 그들만의 손에 익은 공간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영화 룩 백에서 몰입으로 충만한 그들의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며 다시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돌이켜보고 자극받게 되었다.
건축은 싸움이다
좋아하는 건축가의 책, 안도 선생님의 "연전연패"에 나오는 말이다. 이 한문장으로 그의 태도 많은 부분을 엿볼 수 있는 것 같다.
누구에게나 맞는 말이라고 여겨지지는 않을 수 있겠으나,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도 꽤 맞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그럼 내 싸움은 누구와, 무엇과의 싸움인가?
근래 나에게 들어와 진행했던 상담 건들을 돌이켜보면,
1) 합정동 대수선 - 위반해소를 위한 철거공사 필요, 이후 대수선(계단 위치를 옮기고 싶어 해체공사 수반 필요할 것으로 보임)
2) 동교동 용도변경 - 위반해소를 위한 철거공사 필요, 이후 용도변경
3) 망원동 인테리어 - 오래된 건물로 현황도면 없음, 위반건축물은 아니지만 무단증축한 부분이 있음. 철거공사 필요, 이후 내부 인테리어(인허가업무는 요하지 않음)
4) 신길동 증축 - 오래된 건물로 현황도면 없음, 위반건축물은 아니지만 실측결과가 공부상 면적과 많이 차이남.

위반내용을 알고는 있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대로 앞으로도 살아가려는 사람들, 위반사항을 자기 비용으로라도 시정해서 이 건물에 들어와서 새로 장사를 해보겠다는 사람들, 시정은 모르겠고 원하는 대로 처리하고 싶은 사람들 등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들의 입장에서 듣게 되는 요즘이다.
개업 초기, 경험과 포트폴리오가 얕다보니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할 수밖에 없다는건 알지만, 나는 무엇과의 싸움을 해나가는지는 알고 싸움에 임해야 하지 않겠는가.
최근 나의 고민들을 글로 풀어놓고 내 싸움의 실체를 파악해봐야겠다.
- 위반건축물: 요근래 가장 많이 언급한 단어가 아닐까 싶다. 연고 없는 대림동이란 동네에 와서 사무실 근처의 동네 일들을 처리하고 싶다는 소박한 목표로 인허가 업무를 시작했지만, 상담 건들을 마주할때마다 나는 어떤 스탠스로 일해야하는가를 늘 고민하게 한다.
오랜기간 사람이 살다보면 집을 이렇게도 쓰고 저렇게도 쓰고싶은 욕망은 자연스레 생기기 마련이고 그러한 현상 자체를 나쁘게만 보고 싶지는 않다. 더 중요한 것은 위반사실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있는 것 같다. 알아서 잘, 적당히 잘, 아사모사하게 등의 방식을 요구받을때 단순히 그렇게 안한다고 거절하는 것을 넘어서 어떻게 말해야 할까. 어떻게 하도록 해야 할까.
- 디자인과 대관업무의 밸런스: 상담을 하던 중, 건축사의 업무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다. 건축 서비스 용역을 제공받는 것의 세부내용에 관한 이야기였다.
설계업무(여기선 디자인에 한정지어 좁게 표현하겠다) + 인허가업무 + 감리업무 이렇게 설명드렸다. 각각 하는 일이 무엇이고, 그 결과물로는 뭐가 나오는지. 그러면서 최근 상담을 생각하면 인허가업무에 치중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최근 업무들은 좁고 어두운 만화가의 책상에서 어떨 때는 스케치를 어떨 때는 도면작성에 몰두하는게 아니라, 통화-통화-통화-법령정보시스템 들여다보기-통화-통화를 이어나가는 생활을 해오고 있다. 물론 지금의 이 치중은 첫 2~3년은 동네 일거리에 몰입해보자고 내가 선택한 것이기에 불만은 없지만, 사무실의 브랜딩이 인허가로 굳어지긴 원하지 않는다. 황금 밸런스를 열심히 찾아야지.
설계공모가 아닌 동네 일거리로 눈을 돌린 결과일지는 모르겠으나, 이 분야에도 설계공모 당선 못지않은 난관들이 확실히 존재하고 있다. 아, 그렇다고 설계공모를 아주 놓아버린 건 아니다. 사무실 운영 방침을 고민하다가 연 2회 정도의 설계공모는 해나갈 계획이다.
뒷모습이 주는 힘
나는 여전히 수많은 건축가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다. 그들이 앞길을 걸어가서가 아니라, 각자의 책상에서 각자의 치열한 싸움을 해나가고 있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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