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이 높고 깨끗한 9월 언젠가, 아내와 남한산성에 놀러가 외식을 하고 산책을 하던 중에 군밤을 파는 젊은 남성들이 영업을 한다.
영업맨: “하나 드셔보세요~”
나: “괜찮습니다.”
영업맨: “안사가실거 아니까 맛만이라도 보세요~”
나(속으로): '오... 저 멘트 나중에 영업할때 써먹어야지.'
마지못해 받아 먹는 모습까지 지켜보며 다음 멘트를 준미하는 영업맨이 부담스러워 아내가 말을 꺼냈다.
아내: “집앞에 밤나무가 있어서 밤이 너무 많아요.”
영업맨: “집앞에 밤나무가 있기 어려운데…”
(상황 종료)
우리집 앞에는 실제로 커다란 밤나무가 있는데, 가을이 되면 9월은 밤을 줍는 시즌이 된다. 이 동네로 처음 이사온 작년 가을에는 새벽부터 정말 부지런히도 밤을 주웠다. 아마 우리집 말곤 이 동네에 오래 사신 분들이라 그런지 큰 감흥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집근처 식당을 운영하시는 아주머니는 강아지 산책을 하며 정말 부지런히 밤을 주우셨는데, 언젠가 한 번은 나와 아내에게 크고 실한 밤이 많이 떨어져 있을법한 스팟도 알려주셨다.
올해 역시 밤나무는 어김없이 우리에게 이벤트를 열었고, 최근 이사온 가족들은 밤나무가 주최한 행사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심지어 집근처 토목/공동주택 공사가 한창인데 안전모를 쓰고 밤을 줏는 외부인까지 더해져서 올해는 경쟁이 치열해졌다.
치열해진 이 이벤트를 즐기며 아내와 지난 1년이 얼마나 빨리 흘렀는지 되새겨본다. 가을은 책상앞 달력이 아니라 집 앞 밤나무를 통해 찾아왔다.
집앞에 심어진 밤나무가 나의 지난 1년을 돌이켜보게 만들어준다는 점은 꽤 흥미롭다. 흥미롭다고 생각이 든 이유를 뜯어보면,
1. 밤나무와 내 지난 1년은 사실 아무런 관계가 없음에도 연상 작용을 일으켰다는 점 -> 계절의 주기성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2. 나의 지난시간들을 평상시에 자주 돌이켜 생각하지 않지만 이런 기회를 통해 회고해볼 수 있다는 점
이런 이유로 집앞에 밤나무가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해본다.
빛과초록 이라는 이름을 사무실에 내걸었던 것은 어쩌면 그 요소들이 계절의 주기성을 느끼게 해주는 것들이라 마음에 든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요소들을 통해 자기자신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공간을 좋아해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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